잠시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하죠.
의상을 전공하던 대학교 3학년 때, 과 선배의 소개로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패션 에디터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됐습니다. 고가의 패션 브랜드 샘플들에 둘려싸여 있고, 촬영장을 카리스마로 압도하고, 파티에서 트렌디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모습이 그리 멋져보일 수가 없었죠(물론 이 직업에 뛰어든 후에야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알았지만요..).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 하던 그 시절엔, 일할 때 마주치는 독특한 남자들(말할 때 다리를 꼬거나 여자같이 말하는 남자들)을 그저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게이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죠.
몇개월이 지나자, 제 주위의 인물들(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남자 몇명)이 남자를 좋아하고 사귀는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사춘기 때 성립됐던 성적 정체성에 혼란이 마구 오더군요. 하지만 곧 환경에 적응해갔습니다. 선망하던 디자이너 톰 포드가 보그 인터내셔널 편집장(물론 남자)과 애인이란 사실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고, 뒷태만 봐도 게이인지 판별이 되고, 게이라는 이유로 더 편하게 소소한 얘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Sex and the city>에서 캐리가 게이 친구 스탠포드와 자신의 고민을 상의하듯이 말이죠.
아시아는 보수적인 성향 덕분에(?) 그 정도가 심하지 않지만, 유럽과 미국의 패션계의 파워는 게이들이 거머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요 매체의 편집장이 남자라면 대부분 게이이고(예외적으로 <ESQUIRE> USA판 편집장은 게이가 아니랍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해외의 유명한 남자 디자이너 또한 그렇습니다. 2년 전인가. 홍콩의 한 브랜드 PR(여자)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패션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는 게이여야 한대. 패션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게이들이 서로를 위에서 끌어주고 뒤를 봐준다는 거지. 그렇다면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무식하게 일만 열심히 해야 한대(웃음)." 세상에..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현재 해외 패션계에서 게이들이 서로를 키워주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국내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이고 있지요. 얼마전까지 함께 일했던 한 남자 후배는 외관상으론 너무나 멀쩡한(?) 한국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러갈 때 조심스럽게 걷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상했죠. 심지어 같은 회사의 다른 에디터들도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가 국내에서 유명한 남성복 디자이너와 애인 사이임이 밝혀졌죠. 그들은 단순한 애인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일을 도와주고 힘을 실어주는 관계였던 거죠!
제가 가끔 이런 얘기를 패션계와 관계없는 남자들에게 하면 징그럽다며 심한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징그럽기야 하죠. 하지만 현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솔직히 남자 패션계는 게이들이 주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여자들 이상으로 패션에 민감합니다. 쇼핑을 너무나 좋아하고, 자신보다 옷 잘 입은 사람들을 질투하고, 피부 관리에 철저합니다. 예쁜 옷에 대한 욕심은 여자들의 집착, 그것을 능가합니다. 그러니... 쇼핑을 귀찮아하고 옷에 관심이 없는 '보통 남자'보다는 '게이'가 패션의 트렌드를 이끌 수 밖에 없는 거죠.
# by margarita | 2006/01/27 0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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